

병산에 부는 바람
어슴푸레 피어난 안개비가 병산(屛山)의 거대한 어깨 위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굳이 서둘러 피하거나 우산 쓸 필요를 못 느낄 만큼 미약하고 가녀린 비였다. 연회색 하늘 아래 물기를 머금은 초록 수목이 더욱 선명하게 짙어졌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라는 병산서원의 입구 표지석 옆에서 류시완은 고개를 천천히 움직여 눈앞의 풍경을 훑었다. 군데군데 소나무가 심긴 녹색 잔디밭 아래 은빛 백사장과 굽이쳐 흘러와 큰 못을 이룬 낙동강 한 자락, 그 뒤에 우뚝 서 있는 병산이 그의 시야로 안겨들었다. 비가 촉촉이 내릴 뿐 모두가 평소와 같은 모습인데, 산(山)만은 마치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 유별나 보이는 아침이었다. 류시완은 가슴을 끌어모아 심호흡을 크게 한 뒤, 가마니를 깔아 만든 경사진 길로 복례문(復禮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길 양편에 가지런히 식수 된 야트막한 배롱나무들을 지나 앞마당 끝의 돌계단에 오르자, 솟을대문인 복례문이 그를 맞았다. 류시완은 머리를 조아려 예를 갖춘 후 서둘러 문으로 들어섰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유교 정신 선양회원들이 모이려면 아직 한 시간 넘게 남았지만, 바삐 움직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장소인 만대루(晩對樓)에 올라 잠시나마 호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평소 목조 문화재를 보호하느라 출입이 제한된 만대루는 향사나 선양회 정례회의 등 특별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개방되었다. 그때마다 그곳에 오르는 것이 그가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호사라면 호사였다.
복례문을 지나 열 칸쯤의 돌계단을 오르기 전, 류시완은 고개를 들어 정면의 만대루를 응시했다. 가로 폭이 일곱 칸이나 되는 2층짜리 나무 누각이 당당하면서도 유연한 모습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힘찬 필체의 현판을 볼 때마다 그는 가슴부터 뛰었다.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라는 두보의 시 구절에서 따온 이름처럼, 해 질 녘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병산의 푸른 절벽은 압도적인 황홀감을 안겨주었다. 사위어가는 빛 속에서 자연이 만들어 낸 병풍을 마주하면 절로 감탄사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며 가슴은 무언가로 꽉 차올라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류시완은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아래층의 나무 기둥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만대루는 늘 그를 대충 지나치게 하는 법이 없다. 현판부터 기둥 하나하나, 누마루 바닥 한 칸까지 음미하듯 구석구석 그의 눈길이 머문다. 2층의 곧은 기둥과 달리, 아래쪽 1층의 자연스럽게 휘어진 아름드리나무 기둥은 구김살 없이 편안하다. 든든하게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모습만 봐도, 그는 무턱대고 굵은 기둥 하나에 양팔을 둘러 그러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유연한 그 품에 안기면 명치끝 단단하게 응어리진 마음이 어느새 스르륵 풀어질 것만 같았다. 깊숙이 패인 굵은 주름의 나무 표면을 가만히 손으로 쓰다듬은 후, 류시완은 터널을 통과하듯 누마루 천장 밑을 지나 중앙의 돌계단을 통해 올라갔다.
올라선 계단 발치께에 유교 정신 선양회 정례회의를 알리는 배너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서원 관리를 맡은 아재가 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모양이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입교당(立敎堂)과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양쪽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뒤로 한 채, 신을 벗고 만대루 2층으로 오르는 왼쪽 계단에 발을 디뎠다. 통나무를 그대로 깎아 만든 뭉툭한 계단을 통해 만대루 2층에 오르자, 젖은 초록으로 꽉 찬 산과 강이 그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저절로 류시완의 어깨가 펴지면서 입에서는 긴 날숨이 터져 나왔다.
기둥과 난간을 빼고 창문도 창호도 없이 사방으로 뚫린 누각은 사시사철 아름다운 자연을 서원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어디 한군데 막힘없이 탁 트인 공간 사이로 병산의 푸른 숨결과 강물의 찰랑임, 향긋한 꽃내음이 수시로 드나들며 하나로 섞인다. 자연은 그곳에서 함께 흐르고 번지며 맞물려 이어진다. 텅 비었던 공간이 모든 걸 끌어안아 수용하면서 순식간에 가득 채워진다. 만대루에 올라 서원 건물과 건물 밖 자연이 조화롭게 하나 되는 풍경을 볼 때마다 류시완은 숙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만대루는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있는 듯하제?”
오래전 2층 누각에 나란히 오르며 숙부는 무심히 툭 말을 뱉었다. 류시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엷게 미소 띤 얼굴로 숙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굳이 애쓰거나 티 내지 않아도 모든 걸 하나로 감싸며 자연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만대루의 넓은 품이 흡사 숙부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사사건건 숨 막히게 예법을 따지고 타협 없이 완고한 아버지보다 그가 숙부를 더 따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숙부는 틈틈이 시를 쓰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였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한 아버지와 달리 숙부는 주위의 추천이나 권유에도 어떠한 감투도 쓰지 않고 평교사로 퇴직했다.
깍깍. 갑자기 까마귀 울음소리가 습기 찬 대기에 파문을 일으키며 상념에 잠겨 있던 류시완을 깨웠다. 그가 아래쪽 배롱나무들 너머까지 이리저리 두리번거렸지만, 새는 깃털 한 올도 보이지 않고 날카로운 소리만 귓가에 달라붙었다. 문득 보름 전 무겁게 입을 떼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정밀검사가 더 필요합니다.”
입을 일자로 거의 벌리지 않은 채 말하는 의사의 표정과 말투는 TV 드라마에서 봤던 저승사자의 얼굴처럼 단호하고 건조해 보였다. 60살 생일 기념으로 아들 준하가 챙겨준 종합 검진 결과의 추가 상담을 하러 간 길이었다. 10년 전 칠순을 목전에 두고 세상 뜬 숙부처럼 몇 달 전부터 자꾸만 등에 묵직한 통증이 찾아와서 꺼림직하던 차였다. 애써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는데 의사와 면담하면서 그는 어쩌면 자신이 숙부와 같은 병을 앓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어떤 사람을 정말 좋아하고 따르면 가는 길도 비슷해지는가. 마음으로 가장 의지했던 어른이라 숙부의 죽음은 꽤 오랫동안 류시완을 무거운 슬픔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했다.
“아는 순간 환자가 되는 기라 모르는 게 편하고 낫다카이. 칼을 대는 게 아인데, 마, 수술하이께네 확 퍼져 부렸다.”
수술 후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되뇌던 숙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숙부는 수술한 지 일 년이 채 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 류시완은 일정을 맞춰봐야 한다는 이유로 약속도 잡지 않은 채 도망치듯 진찰실을 물러 나왔다. 병원 문을 나서는 그의 마음에는 이미 숙부가 일러준 방향키가 확실히 잡혀 있었다.
갑자기 류시완의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액정 화면에 ‘안동역에 막 도착해서 지금 서원으로 갑니다’라는 아들 준하의 메시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전화한 준하의 목소리는 의외로 피곤한 기색 없이 생생했다. 하루 이틀 전쯤 입국해서 내려왔으면 더 여유 있고 좋았을 텐데. 기왕이면 아들과 함께 아버지와 어른들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든 그는 아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쪽을 택했다. 10여 년 전 그날 이후 확실하게 그가 정한 나름의 원칙이었다.
“니 못하게 했드이 대신 아들 시킬라꼬? 그림쟁이 뭐가 좋다꼬.”
“지는 준하가 하고 싶은 거 하게 할랍니더.”
고집스럽게 학자가 되길 강요했던 아버지의 반대로 화가의 꿈이 꺾인 건, 자기 한 사람으로 족하다는 생각이었다. 준하가 미술대학 조소과(彫塑科)로 진학할 뜻을 밝혔을 때 류시완은 격렬히 아들을 두둔했고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멱살잡이를 당했다. 그 뒤로 할아버지와 손자는 서로 다른 견해로 부딪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왜 할아버지 마음대로만 하세요?”
두 사람 사이의 마찰과 파열은 류시완의 중재와 봉합으로 어색하게 마무리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와 대립하면 참고 수용하기만 했던 자신의 과거가 되살아나 그의 현재를 아프게 덮쳤다. 종종 만대루에 데려가 상처 난 가슴을 어루만져주던 숙부 생각도 간절했다. 아들이 고향집에 잘 내려오지 않고 밖으로만 도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준하는 갑자기 조소 전공에서 영상 디자인으로 방향 전환을 하더니, 그것도 모자라 바다 건너 미국 회사에 인공지능(AI) 관련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자리를 잡았다. 류시완은 두려움 없이 새로운 경험이나 변화의 바람에 유연한 아들이 놀랍도록 낯설면서도 대단하게 여겨졌다. 출국하기 전 인사하러 내려온 준하를 아버지는 제대로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절마 이케 가버리면 우리 가문은 여서 절단난데이. 이적지 지키온 걸. 니는 뭐하노? 아들내미 하나 잡질 몬하고. 우짜노 우리 장손을….”
“인사드렸으께네 니는 인자 가라. 잘 댕겨 온나.”
두말할 필요 없이 류시완은 아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아버지가 쏘아대는 비난과 원망, 훈계의 화살을 막아내는 건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반면, 하고 싶은 일들로 삶을 채워가는 준하를 볼 때마다 류시완도 덩달아 어깨가 으쓱하고 가슴이 꽉 차올랐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부럽고 쓸쓸한 감정이 섞여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눈에 아들은 거침없는 상승과 도전의 이미지로 한없이 빛나 보였다. 그에 반해 자신은 소극적이거나 유약하고 선량한, 예의 바른, 고분고분한, 의지가 약한 같은, 무난하지만 결코 호감이 가지 않는 수식어들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결국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그는 공무원으로 일하며 어느덧 정년을 맞고 있었다.
유교 정신 선양회원들이 도착할 시간이 다 되어 류시완은 서둘러 표지석이 있는 입구로 다시 내려갔다. 황토색 가마니를 깔아 만든 길은 촉촉이 물기를 머금고 있었고, 더 작은 입자로 가늘어진 비는 아직 내리는지 그쳤는지 구분이 안 될 만큼 드문드문 보였다 말았다 했다. 그는 손에 쥔 우산을 펴지 않고 그대로 선 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연달아 달려오는 검은 색 세단 두 대가 그의 시선에 잡혔다. 거의 동시에 류시완의 몸이 똑바로 펴지며 등 근육이 바짝 굳어졌다. 맑은 날의 보통 때 같으면 비포장도로의 요란한 흙먼지가 손님들의 등장을 알렸을 텐데, 비에 젖은 길은 습기 찬 흙냄새를 은근하게 코로 전해줄 뿐이었다.
맨 앞의 까만 자동차가 류시완 앞에서 정지했고 뒤따라온 두 번째 차 역시 그 뒤에 멈춰 섰다. 그는 반사적으로 우산을 편 후 자신 앞에 서 있는 차 뒷문을 재빠르게 열었다. 우산 밑으로 머리를 내밀며 차에서 내린 사람은 예상대로 그의 아버지였다. 초등학교 교장 시절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흐트러짐이 없었다. 큰 키는 아니지만 다부진 몸매와 각진 얼굴, 일자로 꽉 다문 입은 늘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유림(儒林)의 전통을 강조할 때면 그 기세는 더욱 막강해 보였다.
“왔나? 우산은 치아도 된다.”
아버지는 회의 후 이어질 제향 의식 때 입을 옷이 담긴 보따리를 류시완에게 건넸다. 동시에 눈으로는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보자기에 싸인 꾸러미를 우산 밑으로 들이며 류시완은 아침에 신경 써서 챙겨 입은 자신의 감색 정장 재킷을 내려다봤다. 나이 지긋한 유교 정신 선양회원들이 두 대의 차에서 연달아 나눠 내렸다. 그들은 일일이 류시완의 인사를 받은 뒤 최연장자인 아버지와 나란히 혹은 한 두 걸음 뒤에서 천천히 서원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모두가 유림의 일원인 어른들이었다. 훗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류시완도 그들과 같은 행보를 걸을지 모른다. 아니면….
그가 서둘러 서원 안으로 뒤따라 들어가니 아버지와 어른들은 벌써 입교당의 대청마루에 올라서 있었다. 일부는 이미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고, 정면의 두 기둥 사이 병산서원(屛山書院)이라 쓰인 현판 너머로 가운데쯤 자리 잡은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회원들이 원형으로 빙 둘러앉은 중앙 마루는 과거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곳으로, 세대에 걸쳐 이야기가 오가며 한뜻으로 모아져 온 중심 장소였다. 흐르는 병산의 바람 속에서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은 빛바랜 마룻바닥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회의 모습을 핸드폰 카메라로 몇 컷 담은 후 그는 다시 만대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나저나 준하는 왜 아직 도착을 안 하는 건지. 류시완은 왼손을 들어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서원 제사인 향사나 알묘례(謁廟禮) 때 한번 참석해 보라 해도 준하는 남 일처럼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지나치게 전통에 치우쳐 예법이나 겉치레만 강조할 때가 아니에요. 좀 더 유연해져야죠.”
할아버지가 들으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말이라 하면, 준하는 이제 시대가 변했다고 미래에 맞춰 나갈 때라며 힘주어 말했다. 보름 전 병원에 다녀온 후 마음이 괜히 급해져서 류시완은 일부러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양회의 날짜에 맞춰 안동에 다녀갔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에 준하는 의외로 순순히 휴가를 내겠다고 답했다.
류시완이 만대루로 다가서는데, 자기보다 조금 아래 연배로 보이는 중년의 부부가 막 돌계단을 올라와 입교당을 마주 보고 섰다. 보통 평일 이른 오전 시간에는 드문 일반인 관람객이었다. 곧바로 부부 중 남자가 사방을 둘러보며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 서원이라며 감탄하는 소리가 그의 귓가로 날아들었다. 슬며시 류시완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병산서원이 하회마을의 주산(主山)인 화산(花山)을 등지고 앞으로는 낙동강을 품고 있으니 꼭 맞는 말이었다. 그는 문득 요즘 배산임수라는 말을 아는 젊은 청년 세대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졌다. 이내 여자가 “여기는 들어갈 수 없나보다”라며 아쉬운 듯 고개를 쭉 빼고 만대루 안을 기웃거렸다. 순간 류시완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올라가서 구경하이소.”
커진 눈으로 고맙다고 인사하는 두 사람을 안내하며 류시완도 만대루 2층의 누마루 위에 다시 올라섰다. 부부는 왼편에 걸린 북과 오른편 두 줄로 나란히 평행을 이뤄 마주 보고 놓여있는 회색 방석들에 시선을 보낸 뒤 가운데쯤의 난간 앞에 자리를 잡고 섰다. 와와.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감탄사를 쏟아내는 그들을 보자 그의 입이 근질거렸다.
“이곳은 유생들의 휴식과 강학 공간이었는데, 건물 밖의 자연과 안쪽의 인공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어우러져 서로가 교감하며 사색하던 곳입니더. 기둥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일곱 폭 병풍에 담긴 그림 같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이 고요히 만대루의 멋과 쉼을 음미할 수 있도록 류시완은 더 이상의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사람도 시절도 변하지만 늘 그대로 그 자리에서 묵묵히 두 세계를 포용하고 있는 공간이 그도 새삼 듬직하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또다시 숙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대루에서 자연과 건축이 조화로운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스며들어 살자던 숙부의 말과 함께였다. 그는 색바랜 누각의 나무 기둥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아버지, 저 왔어요. 아들 왔는지도 모르고 계시네.”
퍼뜩 정신을 차리니, 만대루 아래 광영지(光影池) 앞에서 준하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들이 까만색 볼캡과 점퍼 아래 받쳐 입은 청바지부터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검정 상의를 입어서 다행이라며 그는 애써 걱정을 눌렀다. 옆에 서 있던 중년 부부가 류시완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통나무 계단을 내려가려 돌아섰다. 그도 눈인사로 화답한 뒤 준하에게 조금 목청을 높여 말했다.
“니 안 올라오고 뭐 하노?”
“여기가 편해서요. 제일 좋아하는 곳이잖아요.”
준하는 고개를 돌려 서원 속 정원인 연못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아들은 병산서원에 올 때마다 복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있는 광영지 앞에서 한참을 머물곤 했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이 있고, 돌로 꾸며 두 단으로 조경된 섬 꼭대기에는 자그마한 아기 소나무가 한 그루 쉬고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뜻이 담긴 연못. 왼쪽 위로 비스듬히 서 있는 배롱나무는 물 위에 그늘을 드리우며 작은 잎사귀들을 무수히 떨궈 놓았다. 앞쪽으로 동그랗게 모여 있는 작은 연잎 무리까지, 물 위에 하늘과 구름이 그대로 투영된 연못은 구도가 멋진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시켰다. 준하는 연못이 사시사철 거울처럼 정직하게 자연을 담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문득 류시완은 아들이 단지 광영지를 좋아해서 들어오질 않는지, 아니면 만대루 너머로 들어오길 망설이고 있는 건지 잠시 궁금해졌다. 비는 거의 그쳐가는 중이라 물 위에 보일 듯 말 듯 간간이 여린 동심원의 무늬가 어리고 있었다. 류시완은 만대루 위에 서서 눈 아래 광영지 앞의 아들과 입교당의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흐르는 물처럼 만대루를 사이로 습기 찬 바람 한 점이 세 사람을 연달아 훑고 지나갔다. 바람이 그들 삼대를 가만히 끌어모아 이어주는 것 같았다.
“할부지께 인사드리라.”
류시완은 마침내 입교당 앞뜰로 올라온 준하의 어깨를 떠밀었다. 회의가 끝났는지 선양회의 참석자들은 대청마루에 삼삼오오 흩어져 있었다. 올 때부터 아예 제례복을 갖춰 입고 도착한 선양 회원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어른들은 입교당 양옆의 방으로 나눠 들어갔다. 곧 이어질 알묘례 때 입을 복장으로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열리는 정식 향사는 아니라도, 아버지가 늘 정성을 다하고 중시하는 제향 의식이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 얼마 뒤 황색 도포를 걸치고 머리에는 검정 정자관(程子冠)을 쓴 아버지가 방에서 나와 대청마루 끝에 섰다. 그 도포는 류시완의 아내가 결혼 때 혼수품으로 해온 최고 품질의 안동포로 만든 것이었다. 아버지가 훗날 세상을 하직할 때 수의로도 입겠다며 애지중지하는 도포였다.
“니 옷 꼬라지가 그기 뭐꼬?”
준하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인사하자, 아니나 다를까 마뜩잖아하는 표정의 아버지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버지의 반응인데도 류시완은 울컥 가슴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솟구쳐 올라와 볼멘소리를 해버렸다.
“아부지, 준하가 직접 봉행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껴? 미국서 새벽에 막 도착해서 내리온 안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류시완을 보자마자 준하는 슬그머니 그를 가로막으며 나섰다.
“할배, 죄송함니더.”
안동을 떠나 유학한 이후로 거의 쓰지 않던 고향 말까지 능청스럽게 쓰면서 준하는 반달눈이 되어 하회탈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까지 늘 아들이 반기를 들면 류시완이 중재하느라 진땀을 뺐는데 역할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타지에서 직장 생활하더니 많이 느물느물해졌네. 류시완은 멋쩍게 속웃음을 삼켰다. 평소의 자기답지 않게 벌컥 얼굴을 붉힌 일이 민망하기도 했다. 한껏 치켜 올라갔던 아버지의 양 눈썹이 이내 수그러들면서 부쩍 누그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준하야, 치심(治心)이나 예를 갖추는데 기본은 의관을 정제하는 것부터데이.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조심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우선이다 아이가?”
“네에.”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돌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준하는 대답도 태도도 고분고분하기만 했다. 어쩌면 더 이상의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류시완은 불편하게 굳어있던 몸이 풀리면서 어떤 관문 하나를 통과한 것 같은 안도감마저 들었다.
“니 오랜만에 달라 보인다. 순순히 여 내리온 것도.”
류시완은 준하와 함께 입교당과 동재 사잇길로 걸어 들어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준하는 머리에 쓴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입가에 어색한 미소만 얹었다. 그리고 왼쪽 어깨에서부터 사선으로 매고 있던 서류 가방 크기의 검정 크로스백에 가만히 오른손을 얹었다.
정면 존덕사(尊德祠)의 열린 내삼문(內三門) 안쪽으로 미리부터 도포를 챙겨입고 왔던 선양회원 한 명과 서원 관리 아재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제기와 돗자리 등을 가져다 놓고 봉행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서원 내 강학과 제향 공간은 신문(神門)이라고도 불리는 존덕사 입구의 내삼문으로 구분되었다. 위판을 모신 사당인 존덕사는 신성한 곳이라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지어졌고, 부정한 것이 들어 오지 못하도록 내삼문에 붉은 칠을 해 놓았다. 류시완의 시선이 존덕사 앞 돌계단 왼쪽 경사면에 있는 커다란 배롱나무에 가닿았다. 380여 년의 세월을 품은 나무는 시간의 무게를 버티는 듯 앞으로 약간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가지마다 가득한 초록 잎에는 학문을 연구하며 예를 배우고 실천한 이들의 유구한 역사가 담겼다. 아버지가 늘 강조하는 유림의 정신이야말로 나무에 생생히 어려있을 거였다. 그는 막 열두 개의 존덕사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준하를 서너 걸음 뒤에서 따라 올라갔다. 세 칸의 문을 하나의 지붕으로 덮은 내삼문은 제례가 없을 때면 늘 닫혀 있었다. 가운데 문은 혼령이 드나드는 문이라 해서 정식 향사 때를 제외하고는 열지 않았다. 닫힌 중문에 그려진 빛바랜 태극 문양이 옛 기상을 드러내듯 새삼 위엄 있고 당당해 보였다. 알묘례를 위해 열린 왼쪽 서문과 오른쪽 동문 중, 좀 전에 보았던 두 사람이 동문 입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앞서 올라간 준하가 잠시 주춤하더니 비어 있는 왼쪽 문을 향해 서서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려 했다. 류시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문 안쪽에서 도포 입은 선양회 어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짜로 들와라. 여가 유생들이 댕기던 문이라.”
막 왼쪽 문으로 들어서려던 준하가 조심스레 머리를 조아리더니 오른쪽 문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고즈넉하게 담장에 둘러싸여 있는 존덕사가 눈앞에 나타났다. 존재로서 서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세 칸짜리 건물은 신비롭고 엄숙한 고요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비 때문에 땅이 젖어서 대나무 돗자리는 존덕사 앞 잔디밭 대신 사당 건물을 올린 돌 기단 앞쪽 처마 밑에 가로로 길게 깔려 있었다. 돗자리 앞쪽 중앙에 작은 상이 놓였고, 손 씻는 물이 담긴 유기 대야와 하얀 면포가 상 위 자리를 차지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류시완과 준하는 양손을 들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인자 내려가이시더.”
등 뒤에서 선양회 어른이 곧 봉행이 시작될 것임을 상기시켰다. 류시완이 몸을 돌려 돌계단을 내려가는데 옆에서 준하가 ‘후’하고 한숨 비슷한 긴 숨을 내쉬었다. 비록 정식 향사는 아니지만, 아들이 처음 참관하는 서원의 제향 의식인 만큼 찬찬히 살펴보길 바랐다. 혹시라도 건강이 최악의 상태가 된다면 자신을 건너뛰고 준하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아 모시게 될지도 모를 행사였다. 류시완은 아들을 흘낏 쳐다보며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려옴을 느꼈다.
어느새 비는 완전히 그쳤다. 존덕사 앞마당에 아버지를 포함해서 예닐곱 명의 제관들이 나란히 일렬로 서 있고, 그 앞에 봉행 의식의 진행을 맡은 집례(執禮)가 마주 섰다. 정식 향사가 아니라서 적은 인원이었지만, 각기 백색과 황색, 옥색의 도포를 입고 검은색 유건이나 정자관을 쓴 집사들과 사모관대 차림의 헌관(獻官)이 한 명 있었다. 헌관은 얼마 전 부임한 신임 선양회장이 맡았다. 그는 까만 사모(紗帽)와 파란색 관복에 장화 모양의 목화(木靴)를 신고 홀(笏)을 들어 예를 갖췄다. 하얀 도포를 입고 갓 쓴 집례(執禮)의 인도에 따라 알묘례가 시작되었다. 홀로 선 집례와 맞은편에 마주 선 다른 제관들이 읍례(揖禮), 즉, 두 손을 앞에 모아 가슴께쯤으로 올리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런 다음, 모두 공손한 태도로 집례를 따라 한 사람씩 줄지어 존덕사로 올라갔다. 그때까지 역시 두 손을 모으고 봉행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류시완의 곁으로 아까 만대루에서 만났던 중년 부부가 다가와 섰다.
“쉽게 접할 수 없는 귀한 경험을 하네요.”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남자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보였다. 그들은 입교당과 동재 사이 길목 쪽으로 조금 물러서 있었다. 류시완은 고개를 돌려 눈으로 준하를 찾았다. 준하는 벌써 봉행 참석자들 뒤를 따라 사당의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진 위치에서 행렬 끝의 준하까지 들어가는 구도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 한 장에 제향 의식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담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서둘러 행렬 끄트머리로 뒤따라갔다.
제향 인물인 서애(西厓) 류성룡과 그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의 위패가 봉양 된 존덕사 안은 초가 밝혀졌고, 제관들이 미리 깔아 둔 돗자리 위에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기단 위 맨 오른편에 서서 집례가 참석자 모두에게 큰 소리로 순서를 외쳤다. 그가 ‘배(拜)’하고 말하자 일동 절을 했고, ‘흥(興)’하니 모두 일어났다. ‘평신(平身)’은 두 번 절하고 몸을 바로 세우는 구호였다. 신위에 향을 세 번 올린 후 소식을 아뢰고 배알 하는 일련의 제향 의식에는 범접하기 힘든 엄숙함과 정성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향사에 비해 약식이었지만, 알묘례를 지내는 존덕사 안의 공기는 그 무엇으로도 방해받지 않는 신비로운 투명막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언어와 몸짓, 숨결은 하나의 고귀함을 떠받들고 있었다. 준하는 입을 꽉 다문 채 봉행 의식이 치러지는 모습을 홀린 듯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간간이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대었고, 마침내 본격적으로 동영상 촬영을 하는 것 같았다. 양팔을 들어 카메라에 시선을 모아 집중하고 있는 준하의 모습은 여간 진지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숨죽여 정성스럽게 촬영하는 태도가 듬직해 보였다. 류시완도 조용히 주위를 맴돌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마침내 제관들이 마지막 재배(再拜)를 한 후 봉행 의식이 마무리 수순을 밟았다. 신비한 꿈에서 막 깨어난 듯 나른한 표정으로 류시완과 준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단해요.”
준하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알묘례가 진행되는 동안, 할아버지께서 늘 강조하셨던 선비 정신이 뿜어나오는 것을 느꼈어요.”
준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약간 떨리는 것 같이 들렸는데, 그에 비해 류시완의 마음은 오히려 우물처럼 차분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준하가 가슴으로 받아들였다는 느낌이 그에게 선명하게 다가왔다.
“마침 이 시간에 맞춰 여기 온 것이 저희에게 행운이었네요. 방해될까 조심스러워 존덕사 문밖에서 지켜보고 사진도 몇 장 찍었습니다.”
다시 불쑥 나타난 중년 부부가 일부러 찾아와서 인사를 했다. 그들은 다음에는 아이들도 함께 데려올 거라고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젊은 세대가 꼭 와서 보고 느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였다. 류시완은 기쁜 마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작년 가을에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의 하나로 병산서원 스테이도 운영했니더. 또 계획 중이니, 그때 또 오이소.”
알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뒤 부부는 서원의 표지석이 있는 입구 쪽을 향해 총총히 떠나갔다. 류시완은 꽉 찬 충만감과 동시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여드릴 게 있어요.”
곁에 서 있던 준하가 크로스로 매고 있던 서류 가방을 어깨에서 벗어내며 말했다. 가방 지퍼를 잡아 여는 아들의 표정이 약간 들떠 보였다. 뭔지도 모르면서 반사적으로 류시완의 입에서“할아버지께 먼저.”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아들의 팔을 잡아끌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알묘례를 마친 아버지는 입교당 앞 무궁화나무 근처에 서 있었다. 알고 보니 아까부터 류시완과 준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던 듯싶었다.
“준하가 보여드릴 게 있다고 함니더.”
준하와 함께 다가가니,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는 입교당 대청마루로 올라가 앉았다. 이미 다른 어른들도 빙 둘러 자리를 잡은 가운데 준하는 공손히 무릎을 꿇고 가방에서 막 꺼낸 노트북 컴퓨터를 마룻바닥 위에 조심스레 올려 놓았다. 준하가 시작 버튼을 누르고 터치 패드를 작동시키자 이내 노트북 화면에 움직이는 영상이 나타났다.
“이기 뭐꼬?”
고개를 앞으로 기울여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아버지가 고함치듯 목소리를 높였다. 류시완도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좀 더 또렷이 초점을 맞춰 보았다. 놀랍게도 화면에서는 빨간색 관복을 입은 서애 류성룡 선생이 정면을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여 말하고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 둥글고 기다란 눈매, 우뚝한 콧날과 코 아래부터 턱 밑까지 길게 기른 수염 모두 초상화와 똑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나, 류성룡이 말한다. 여기 병산서원은 유생들이 자연과 교감하며 어진 인간의 예를 배우고 학문을 닦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병산의 푸른 바람에 실린 선비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열어갈 새로운 미래를 위해 소중한 근원이자 영감이 된다.”
화면 속 서애 류성룡 선생은 천천히 두 눈을 깜빡이며 입술 사이로 중저음의 목소리를 내보내고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 말하는 동안 뺨 근육이 오르락내리락했고 입 주위 주름들은 물결치듯 미세하게 움직였다. 목울대의 떨림과 숨결 소리마저 그대로 전해오는 듯했다. 들썩이던 짙은 두 눈썹도 선생이 한 문장을 마치자, 일자로 가지런히 다물어진 입과 함께 원래의 제자리를 찾았다. 마치 영상 통화할 때처럼 실제로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제가 만든 거예요. 문화유산 복원 프로그램 중 하나인데, 첨단 AI 신기술로 만나는 조상님이시죠.”
한동안 숨소리만 들렸다. 붉어진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아버지는 손을 떨었다. 그리고 떨리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예를 차리듯 화면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가까이 다가와 바라보던 선양회 어른들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커다래진 눈으로 화면을 주시했다. 몇몇은 화면으로 빨려 들어갈 듯 노트북에 더 바짝 다가갔고, 손뼉을 칠 것처럼 두 손을 모으는 사람도 있었다.
“언제 어디에 있든 제 뿌리인 고향 안동과 이곳 병산서원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병산서원의 구석구석을 모두 자료화해서 디지털 영상으로 복원함은 물론, 보신 것처럼 AI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당시 인물들의 표정과 목소리뿐만 아니라 나아가 서원에 부는 바람조차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꾸준히 개발 중입니다. 크게 보면 결국 안동의 정신을 복원하는 프로젝트가 되는 거지요.”
꼭꼭 눌러 글씨를 쓰듯 힘주어 말하는 준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가슴에 박혔다. 어깨를 당당히 펴고 말을 이어가는 아들의 모습이 자랑스럽기만 했다. 벅찬 가슴으로 류시완은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그와 똑같은 눈빛으로 아버지가 준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끌끌 차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마치 자신이 대단한 성취를 이룬 양, 류시완은 실로 오랜만에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아버지는 준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되뇌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류시완의 얼굴도 활짝 펴졌고,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미소까지 걸렸다. 준하가 노트북을 다시 만지자, 이번에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병산서원을 소개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대청마루 여기저기서 감탄하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어느새 갠 하늘의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내려와 입교당 앞에 선 할아버지와 손자를 감싸안았다. 전통과 예법이 우선이었던 세상과 미래라는 또 다른 세상이 맞물려 이어져 있었다. 그 사이 류시완의 세상도 양팔을 뻗어 한껏 안은 채 모든 걸 하나로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시간을 관통하는 실은 같은 뿌리 안에서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그들 삼대를 하나로 묶었다. 선조들이 남긴 고귀한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단순한 전통으로만 남는 대신, 새로운 모습으로 끊임없이 진화하며 더욱 빛나고 있었다. 류시완은 아버지와 준하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본 뒤 슬그머니 물러 나왔다. 그가 향할 곳은 따로 있었다. 그의 의지가 그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고, 모두를 넉넉히 아우르는 곳. 그는 만대루의 품속에 안기고 싶었다. 이제는 그동안 어깨에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류시완은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만대루에 다시 올라섰다. 막힘없이 탁 트인 공간으로 병산의 사계절이 흘렀고, 그 어떤 계절에도 만대루는 자신만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묵묵히 자기만의 고유를 품은 채였다. 갑자기 그의 눈앞에 희뿌연 실루엣으로 숙부의 모습이 나타났다. 꿈을 꾸는지 환상인지 몽롱한 기분으로 류시완은 눈꺼풀을 천천히 깜박였다. 숙부의 목소리가 그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시완아, 이제 니도 하고 싶은 거 해도 된데이.”
류시완의 가슴이 무언가로 꽉 차며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에게도 새로운 미래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책임과 의무감 때문에, 그리고 우유부단함과 소심함 때문에 잃어버렸던 자신을 벌충하고 싶었다. 이제 자기 연민과 슬픔 같은 감정도 그만 떨쳐버릴 때였다. 그는 자신 안에서 의욕과 열정이 솟아오르고 있는 것을 가만히 관조했다. 조만간 병원에 다시 가볼 것이고, 검사 결과에 상관없이 마음먹은 대로 예끼 마을의 벽화 작업에 참여할 생각도 굳혔다. 오래전 의기소침해진 그를 위해 숙부가 사준 화구를 다시 꺼내볼 요량이었다. 류시완은 자신의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의 윤곽을 더듬어보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익숙하고도 낯선 감정이었다.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 병산으로부터 초록 훈풍이 불어왔다. 온몸으로 안겨드는 바람의 속살은 부드럽고 편안했다. 바람이 만대루에서 존덕사 위까지 서원을 훑어 올라갈 때 나무들의 숨소리가 수런거렸고, 바람 끝 햇빛을 머금은 무수한 이파리들이 여러 갈래의 무늬로 일렁였다. 만대루 위의 류시완을 지나 입교당 앞 아버지와 준하에게까지, 서원 전체를 감싸안은 바람 소리는 시간이 줄지어 다가왔다가 연달아 몰려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바람에 의해 시간의 지층이 오백 년, 천년 켜켜이 쌓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다시 바람 한 점이 밀려와 아버지의 도포 자락과 모자 밑으로 나온 준하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흔들었다. 양손으로 준하의 오른손을 감싸 쥔 아버지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만대루 위에서 원경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따로 떨어져 있는 듯하다가 이내 하나로 뭉뚱그려져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로 준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문득 서애 류성룡 선생의 얼굴이 비치더니, 그대로 준하의 얼굴에 아버지의 모습으로 겹쳐졌다. 서로 깊이 스며든 세 사람은 경계가 흐려지고 뒤섞여 마침내 구분되지 않았다. 바람 따라 흐르던 각자의 시간이 겹치고 합쳐져 또 다른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병산에서 불어온 바람은 새로운 시간을 가져다줄 웅숭깊은 숨결로 가만히 번져갔다.